맨몸으로 현대사를 꿰뚫은 러시아 남자
'리모노프'
실존 인물 에두아르드 리모노프 삶을 佛 작가 카레르, 문학적 다큐로 그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겸 영화감독인 엠마뉘엘 카레르(58)의 이름 앞에는 «오늘날 몇 안 되는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작가”(파리 리뷰)», 프랑스의 가장 독창적인 작가 중 하나”(뉴욕타임스), «가장 중요한 프랑스 작가» (가디언) 같은 수식이 흔히 붙는다. 1986년 발표한 첫 소설 ‘콧수염’으로 ‘문학의 천재’란 평가를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카레르는 2000년 이후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 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로 기록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기사체의 사실적이고도 건조한 문장들, 직선적으로 이어지는 연대기적 사건들만으로도 인간 내면을 탐사할 수 있다는 것. 페미나상, 아카데미프랑세즈 문학대상 등을 받은 데 이어 2011년 발표한 ‘리모노프’로 르노도상과 문학상의 상, 네덜란드 유럽문학상을 수상했다.
러시아 작가이자 정치인인 에두아르드 리모노프의 삶을 전기적으로 기록한 ‘리모노프’는 60여년에 걸친 주인공의 삶의 이력이 너무나도 장대해 소설 전체가 ‘파란만장’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서사적 개념 정의처럼 보일 지경이다. 리모노프란 인물은 영웅이라고도, 악인이라고도 규정할 수 없는 기묘한 실존인물로, 우리에겐 낯설지만 러시아와 프랑스에서는 상당한 유명인사다. 활화산 같은 성품과 끝 모르는 야망, 지칠 줄 모르는 정력과 대담한 재능이 그 자체로 러시아적인 어떤 것을 반영하고 있는 리모노프는 1942년 소련 하급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살의’를 지닌 인간이 되는 것만이 누구에게도 함부로 당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고 우크라이나의 깡패가 된 소년이다. 직설적이고도 뜨거운 시심(詩心)을 감추지 못해 “소비에트 언더그라운드의 아이돌” 시인이 된 후 문화계 고위인사의 아름다운 애인 엘레나를 빼앗아 자유의 땅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감행하지만, 유명한 작가가 되겠다는 야심이 실패를 거듭하고 엘레나마저 다른 남자에게 떠나버린 후 맨해튼의 거지로 나뒹군다. 기회가 닿아 억만장자의 집사로 재능을 떨치게 된 그는 센트럴파크에 엎드려 노트에 끼적인 글이 우연히 파리 출판계의 열렬한 호응을 얻으면서 파리로 이주, 마침내 인기작가가 된다.
여기서 그쳤어도 좋으련만, 소련 해체와 러시아 공산주의 붕괴는 이 피 뜨거운 사내를 다시 고향으로 불러들인다. “전쟁을 하면 삶과 인생에 대해 두 시간이면 배울 것을 평화로울 때는 40년이 걸려야 배운다. 전쟁이 쾌락 중에서도 최고의 쾌락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는 진실”이라며 인종청소가 자행되던 발칸반도에 세르비아군 사병으로 참전한 것은 서구의 지식세계에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포위상태의 도시 사라예보를 향해 기관총 탄창을 비우는 장면이 전 세계 방송에 송출돼 카레르는 1년간이나 고뇌에 빠져 이 전기소설의 집필을 중단해야 했다.
자본주의의 물이 잔뜩 든 혼란기의 모스크바에서는 «민주주의 1년이 공산주의 70년보다 고통스러웠다»며 민족볼셰비키당을 창당, 청년 무법자들을 이끄는 보스가 됐다. 마침내 꿈에 그리던 스타가 돼 젊은이들의 열렬한 추앙을 받지만 강제수용소에 갇히고, 현재는 푸틴에 맞서는 야권 인사로 활동하고 있다.
때로는 사악하고 잔인하며 때로는 애잔하고 정겨운 실존인물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옹립하면서 카레르는 «판단하지 않는다»는 서술적 태도를 취한다. 다만 «일단 만나보면 절대 실망할 수 없는 사람»의 매력에 자연스럽게 투항하고, «그의 파란만장하고 위험천만한 인생이 러시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우리 모두의 역사에 대해서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우직하게 믿을 뿐이다. 어쩌면 이 판단할 수 없는 인물을 추적하면서 작가가 꾀한 목표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다면성과 입체성을 규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가 실명 그대로 등장해 자신의 자전적 체험을 직조시키는 서사적 방법론은 결론에서 특별한 효과를 발휘한다. 인터뷰의 마지막에 카레르가 «당신은 흥미진진한 인생을, 소설 같은, 아슬아슬한 인생, 역사 속으로 몸을 던지는 위험을 택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하자 리모노프는 피식 웃으며 말한다. «개떡 같은 인생이지, 한마디로». 이 결말에 동의할 수 없는 카레르는 시나리오 작가인 아들과 리모노프를 루저로 만들지 않는 방법에 대해 의논한다. 모험이 계속되는 한 누구도 아직까지 실패한 것은 아니다. 수용소든, 이민이든, 이사든, 먼 곳으로의 이주가 상시적이었던 러시아적인 삶에 모험은 썩 어울리는 결말이다. 리모노프가 모험을 멈추도록 카레르는 결코 놔두지 않는다.
«한국일보», 19.01.2015